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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by 아롱글씨 2022. 12. 22.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무슨 암호 같기도 한 제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네 집에서'라는 뜻입니다. 백석 시인은 해방 직후 만주에서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왔다가 신의주시에서 2~3년간 머물렀다고 합니다.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었다던 시인. 남한에 있는 소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었다던 이 시. 서른서넛 남짓 되었을 젊은 시인은 어찌 이리도 그림 같은 시를 썼을까요. 

 

시는 짧지 않은 분량이나 고작 다섯 문장입니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알려주고, 기거하는 곳의 형편을 들려주고, 혼자 하루를 보내는 광경을 묘사하고, 어떤 심정으로 하루를 보내는지 감정을 늘어놓습니다. 다음에는 나머지 한 문장으로 전체 분량의 반을 채워넣는데, 그게 곧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느냐 하는 얘깁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솟아나는데 그게 끊이질 않고, 토막토막 끊지 못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생각이 멈출 듯 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산문체가 이 시의 톡특한 정취를 자아냅니다.

 

첫 행에서 화자는 바로 아내 얘기를 합니다. 아내가 없다는 것은 부부의 연을 끊은 이혼을 말하는 것인지 사별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 혼자라는 것입니다. 아이 얘기는 없습니다. 결혼했다가 혼자 된 홀아비입니다. 부모, 동생들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아내와도 헤어지고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는 남자는 어떤 심정으로 추운 겨울날을 보낼까요.

바람이 세게 불고 추위가 점점 더해오는 초겨울날입니다. 어느 목수라는 사람은 박시봉이란 이름일 겁니다. 휑하고 썰렁하고 좁은 방 한 칸에 세를 들었습니다. 습내 나고, 춥고, 눅눅한 방에서, 하루종일 마음 편히 늘어지게 자지도 못하고 어떤 근심과 강박에 휩싸여 조용히 괴로워하는 남자가 떠오릅니다. 우선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느껴진답니다. 걱정과 시름이 너무 많아서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벅차도록 느껴지나 봅니다. 
유일한 위안은 아마도 주인집 박시봉 씨가 방에 넣어주는 딜옹배기에 담긴 복덕불일 것입니다. 작은 종지에 담긴 숯불은 겨우 두 손이나 쬘 정도로 소박하지만 한방에 유일하게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부스러기가 타는 재 위에 나무막대로 글자를 쓰거나 그래도 밖으로 나갈 활기를 얻지 못하고 방바닥에 누워 손깍지 베개를 할 뿐입니다. 슬픈 일과 어리석었던 일이 끝내 떨쳐지지 않고 계속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가슴이 꽉 메어 오고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고 맙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고 슬펐고 어리석었던 일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그 일은 아내와 관련된 것일까요, 가족과 관련된 것일까요. 친구나 동료 사이에 있었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 괴로운 감정에 눌려서 그저 죽어야 잊히고 죽어야 마음이 편해질 모양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지내는 나날에 창문이나 천정을 바라볼 밖에 딱히 할일은 없습니다. 예전의 그 일을 의지나 신념으로 극복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혹 더 높고 고귀한 어떤 존재나 운명이 이 남자를 이끌어주었으면 하는 의존적인 생각도 드는 모양입니다.
여러 날 지나는 동안 그 어지러운 마음은 슬픔, 한탄, 회한, 외로움으로 변해버립니다. 날은 더욱 추워져 기온이 떨어지는 저녁 무렵에는 싸락눈이 내리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화로를 끼고 방에 있습니다. 무릎을 꿇어 앉아 두 손을 불에 쬐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나무 한 그루였습니다. 아마 고향에 있을 먼 산, 해가 넘어가 어둑해지는 골짜기 바위 옆에, 싸락눈을 맞으며 똑바로 서 있을 갈매나무를.
싸락눈이 창문을 치며 내는 소리가, 광경이 남자를 갈매나무 곁으로 순간이동시켰습니다. 아마도 더 젋었을 적, 어쩌면 어린 시절 겨울산에 올랐을 때 보았던 광경, 갈매나무가 마른 잎새에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눈을 맞던 그 광경이 떠오른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려 소처럼 멍한 눈길로 지난일만 되새김질하던 남자가 극적으로 희망을 본 순간이었겠지요. 차갑고 서슬퍼런 겨울에 굳고 정한 앞날을 헤쳐나갈 힘을 얻는 순간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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